처분과 행정지도

김·장 법률사무소 공공계약팀 변호사 김태완



처분과 행정지도

주식회사 국제상사를 주력으로 20여개의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었던 국제그룹의 이야기이다. 1985년 그룹의 주거래은행은 갑자기 그룹의 해체 방침을 발표하였고 신속히 후속조치를 밟아 그룹을 사실상 공중 분해하였다. 당시 재무부장관이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 그룹을 해체하기로 기본방침을 결정하고 사전에 인수업체를 결정해 놓은 사실, 이러한 조치의 실행을 위해 주거래은행에 지시하여 그룹에 대한 일방적 자금관리에 착수하게 한 사실, 재무부장관이 국제그룹의 해체를 언론에 공표하는 등 일련의 조치를 공권력이 앞장서 행사하였다는 사실은 뒤늦게 그룹의 권리회복을 위한 소송을 통해 세간에 알려지게 된다. 이에 대해 당시 정부는 국제그룹의 자금사정이 극도로 악화되어 회생불능이었고 그룹의 경영이 방만하였기 때문에 도산의 파장을 최소화하기 위한 차원에서 제3자의 그룹인수를 택하였던 것일 뿐 그룹의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일축하였다. 즉 그룹 해제에 관여한 정부의 조치는 공권력의 강압적 행사하고는 전혀 관련이 없으며 주거래은행이나 그룹이 따라야 할 법적 의무가 없는 일종의 ‘행정지도’ 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대법원은 1994년 12월 정부의 주식매각 강요행위가 위법행위에 해당한다며 다음과 같이 판결을 내린다. “이른바 ‘행정지도’라 함은 행정주체가 일정한 행정목적을 실현하기 위하여 권고 등과 같은 비강제적인 수단을 사용하여 특정인에게 일정한 행위를 하거나 하지 않도록 하는 행정활동으로 이해되고, 적법한 행정지도로 인정되기 위해서는 그 목적이 정당한 것으로 인정될 수 있어야 할 것이므로, 주식매각의 종용이 법률적 근거 없이 자의적으로 제재를 가하는 것이라면 이미 행정지도의 영역을 벗어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고 행정지도라는 미명 하에 법치주의의 원칙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7년여에 걸친 법적 투쟁을 통해 공권력이 행한 그룹 해체의 위법성을 확인 받았지만, 결국 그룹을 되찾지 못한 상태에서 양정모 회장은 2009년 3월 노환과 폐렴으로 별세한다.

정권의 미움을 받아 재계 7위의 거대 그룹이 한 순간에 공중 분해된 위 사건에서 정부와 관련자들이 면죄부로 주장한 주요 논리는 정부의 행위가 ‘행정지도’라는 거였다. 흔히 행정지도는 행정기관이 국민에게 자율적인 협력을 요청하여 행정목적을 달성하는 비구속적 행위를 말한다. 조언, 권고, 주의, 경고 등 다양한 명칭이 사용되고 있고 행정은 국민과의 합의에 의해 자발적으로 행하여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며 공권력을 동원하는 행위는 가급적 삼가하는 것이 좋다는 정신에서 출발한다. 물가안정을 위하여 관련 사업자들에게 목욕요금이나 식품가격을 올리지 말라고 권유하거나 국민들에게 일정한 음식물의 과다 섭취를 자제토록 권유하는 것도 행정지도의 예이다. 구속력 있는 행위가 아니므로 이에 따르지 않더라도 의무위반이 되지 않으며, 개별 법령에 근거와 법적 효과가 명문화되어 있는 경우도 있지만 명문 규정이 없다 하더라도 행사할 수 있다. 다수 학자의 견해 또한 행정지도는 비권력적 행위이고 국민의 임의적 협력을 전제로 하는 행위이므로 반드시 법적 근거가 있을 것을 요하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

행정지도에는 계도를 우선하고 당장의 처분을 유예하는 방식도 있다. 주거 밀집지역의 불법 주차차량에 대한 단속을 실시하여 2회 계도하고 그런 뒤에도 위반하는 차량을 단속하는 ‘삼진아웃제’가 대표적인 예이다.

공공조달을 주제 삼으면서 행정지도를 언급하는 것은 조달 현장에 있어서도 위와같은 제도 도입의 필요성이 점차 커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행정처분인 부정당업자 제재 외에도 거래정지, 판매중지, 직접생산확인취소, 입찰참가자격등록 말소 등 조달 실무에서 양산되는 처분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조달 질서에 반하는 부정행위를 규제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법령상의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단순한 오기, 수요기관의 요청, 협력업체의 독단적 행위 등 부정행위가 일어난 경위나 위반의 경중을 묻지 않고 기계적으로 처분을 부과하는 것이 과연 조달 정의에 부합하는 것인지 고민해야 할 때이다. 다행히도 모 정부기관은 부정당업자 제재와 관련하여 법령이 아닌 내부규정에 행정지도의 근거를 마련하고 단순 오기나 착오, 계약상대방이 인지할 수 없었던 협력업체의 행위로 인한 경우에는 기계적으로 처분을 부과하는 대신 재발 방지의 권고로 갈음하는 조치를 운용해 나가고 있다. 사안의 경미성과 더불어 장래 계약의 적정 이행을 해할 우려가 없는 경우 등에는 직접적인 처분 보다 행정지도가 보다 실효적이라는 것을 제도화한 것으로 처분의 대안 제도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좋은 선례를 만든 것이다.

행정지도는 조달 기업의 재발 방지라는 자발적 협력과 개선을 전제로 다시 기회를 부여하는 의미가 있다. 이 때문에 발주기관과 기업간의 불필요한 마찰을 피할 수 있고 처분에 비하여 행정목적 달성에 소요되는 비용이 적게 든다는 이점이 있다. 부정당업자 제재를 포함한 거래정지 등의 다양한 처분에 대하여 처분권한을 가진 행정기관이 단지 내부규정에 근거를 둠으로써 시행할 수 있다. 행정지도를 조달기업에 대한 특혜로 바라보는 시각이 존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적정하고 필요한 일임에도 행사하지 않는 것과 적정하지 않음에도 행사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