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조달과 ESG

김·장 법률사무소 공공계약팀 변호사 김태완



공공조달과 ESG

프랑스와 영국 사이의 백년전쟁이 한창이던 1347년 영국왕 에드워드 3세가 이끄는 영국군에 의해 프랑스 북부의 항구도시 칼레가 점령당하고 저항한 시민들이 영국군에 의해 학살당할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때 점령자인 에드워드 3세는 칼레에서 가장 부유하고 명망 높은 시민 6명이 스스로 밧줄을 목에 걸고 맨발로 영국군 진영에 찾아와 도시의 열쇠를 바치고 교수형에 처해진다면 다른 시민 모두를 용서해 주겠다는 잔혹한 제안을 한다. 시민들은 과연 어떠한 명망가가 스스로 목숨을 버리겠냐며 절망감에 빠져 들었다. 그때 칼레 최고의 부자인 생 피에르가 교수형을 자처하고 나섰고 연이어 칼레 시장을 포함한 명망가 6명이 지원을 한다. 뜻밖에도 지원자가 7명이나 되자 시민들은 에드워드 3세가 지정한 날 가장 늦게 나오는 한 사람을 제외하기로 한다. 당일 아침이 되자 가장 먼저 지원을 하였던 생 피에르가 보이지 않았다. 다른 지원자들의 결심이 흔들릴 것을 우려해 스스로 목을 매어 생을 마감하였던 것이다. 결국 다른 시민대표 6명이 에드워드 3세의 조건대로 목에 밧줄을 걸고 교수형을 기다리는 순간, 에드워드 3세는 이들의 희생정신에 감동해 모두를 사면하였고 칼레 시민 누구도 학살하지 않았다.

칼레 시민들이 용감한 시민대표들 덕분에 목숨을 보존하게 된 후 500년이 지난 1884년 칼레시 당국은 조각가 로댕에게 칼레의 여섯 시민을 기리는 동상 제작을 의뢰하였고 로댕은 2년여에 걸쳐 조각상을 완성한다. 그런데 로댕이 만든 조각상의 모습은 사람들이 기대한 것과 같은 영웅의 모습이 아니었다. 조각상으로 표현된 것은 칼레시에 대한 희생과 자신의 죽음 사이에서 고민하며 한 사람, 한 사람 고뇌에 찬 모습들이었다. 이 때문에 시 광장에 설치될 예정이었던 작품이 한 때 시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외곽의 한적한 바닷가에 세워진 사실은 웃지 못할 일화로 전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칼레의 여섯 시민상」에 담긴 부인할 수 없는 가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이다. 노블레스(Noblesse)는 Know 와 able의 합성어로 알 능력이 있는 사람, 즉 당시의 귀족들을 지칭하는 의미이고, 오블리즈(Oblige)는 도덕적 의무를 의미하므로 결국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높은 사회적 신분에 있는 자들이 지켜야 할 도덕적 의무를 의미하는 말이 되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신은 초기 로마 사회를 기원으로 보고 있다. 지중해의 패권을 둘러싸고 로마가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과 싸운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의 귀족들은 전투의 참여를 마다하지 않았고 최고 지도자인 집정관 16명이 전사한다. 로마 건국 이후 500년 동안 원로원에서 귀족이 차지하는 비중이 15분의 1로 급감한 것은 계속되는 전쟁 속에서 많은 귀족들이 희생되었던 사실에도 기인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통은 서양의 근, 현대에도 계승되어 전쟁과 같은 난국에서 사회 지도층이 솔선 수범하는 자세를 요구하였고 실제로 제1, 2차 세계대전 중에 영국의 명문 사립인 이튼칼리지 출신 2,000여명이 전사하였다. 이 외에도 포클랜드 전쟁에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의 둘째 앤드루 왕자가 전투헬기 조종사로 참전하였고, 한국전쟁 당시 미군 장성의 아들 142명이 참전하여 35명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입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현재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비단 전쟁과 같은 위급한 상황에서 요구되는 사회지도층의 책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는 보편적 개념으로도 자리잡아가고 있다.

CSR(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의미하는 말로 기업이 경제적 책임이나 법적 책임 외에도 폭 넓은 사회적 책임을 적극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기업의 제품생산 과정에서 환경파괴, 인권유린 등과 같은 반윤리적 행위의 금지와 사회에 대한 공헌, 제품결함에 대한 잘못의 인정과 적정 보상 등을 내용으로 한다. 이와 관련하여 국제표준화기구(ISO)는 CSR을 표준화한 ISO 국제규격 제정을 공표한 바 있다. 그런데 CSR의 긍정적 의미와 취지에도 불구하고 CSR을 기업의 평판 관리 내지 다른 차원의 수익 추구와 관련을 맺고 있다는 시선도 존재한다. 즉 기업은 자선과 기부를 내세우며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있다고 강조하지만 기업의 필요나 선택에 따라 다른 측면의 단점을 가리는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것이며, 코카콜라, 나이키, 월마트 등 사회적 논란거리가 많은 기업일수록 CSR에 더욱 적극적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일례로 코카콜라와 맥도날드는 2012년 영국 런던올림픽에 거액을 지불하고 후원사로 참여하는 방식을 통해 스포츠 이벤트를 통한 기업 이미지 각인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2013년 2월 한국경제연구원은 ‘다시 CSR을 말한다’라는 주제의 세미나를 통해 기업의 사회공헌 활동은 노블리제 오블리주를 실현하는 행위가 아니라 기업영속을 위한 투자 행위로 봐야 한다는 냉정한 분석을 내리기도 하였다.

어찌되었건 우리 기업의 CSR 활동은 점차 늘어나고 있으며 그 외연을 자선, 기부라는 전통적인 방식에서 환경보호와 지역사회와의 상생 등 다양한 형식으로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기업 내에 CSR 전담부서를 설치하고 임직원과 가족의 묘역정화 봉사활동, 한국전쟁 참전국에 대한 해외 공헌활동, 사업장이 위치한 지역사회와의 결연 활동 등 다양한 CSR활동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

CSR은 국가계약 내지 공공조달과도 연결되는 개념이 되어가고 있다. 이미 유럽연합(EU)는 공공조달을 사회 균형 발전의 중요한 정책수단으로 인식하고 ‘사회적으로 책임 있는 공공조달’ 즉 ‘사회책임 공공조달(SRPP)’을 추구하고 있으며, 정부나 공공기관이 재화와 서비스를 구매하는 과정에서 환경, 고용, 노동, 사회통합 등 가치들을 낙찰자 선정, 계약이행 과정에 고려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공공조달 참여업체의 계약이행능력 평가요소로 청렴성과 기업윤리에 관한 자료를 요구하고 있으며, 반독점적 행위, 불공정 거래행위, 탈세행위 등과 같이 기업의 건정성과 정직성이 결여된 행위에 대해서는 공공계약에의 참여를 배제하고 있다. 공공조달 시스템 구축에 있어 우리보다 늦게 출발했다고 볼 수 있는 인도와 중국 역시 정부 차원에서 CSR을 의무화하기 시작했다는 점에 비추어 보면 향후 CSR은 해외 공공조달 시장의 진입 장벽으로 작용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경우 공공공사 분야에서 ‘종합심사 낙찰제’를 도입하여 업체 선정기준에 사회적 책임을 반영하기 시작하였고, 환경(E: environment), 사회(S: social), 지배구조(G: governance) 등 기업의 비재무적 요소에 대한 관리 활동으로 정의되는 ESG를 평가에 반영하는 가이드라인을 마련하고 개별 입찰평가에 반영하기 시작하면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공공조달에 투영하기 위한 제도적 접근을 본격화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조달사업에 관한 법률 제6조에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장려하기 위하여 환경, 인권, 노동, 고용, 공정거래, 소비자 보호 등 사회적ㆍ환경적 가치를 조달절차에 반영할 수 있다’는 근거를 마련하였으며, 이를 토대로 조달청장은 2022년 5월 공공조달의 사회적 가치평가 기본지침을 마련하고 경제활력, 상생ㆍ협력, 탄소중립, 보건ㆍ복지ㆍ안전 등 환경(E)과 사회(S)에 해당하는 평가항목 풀에서 발주기관이 실제 개별입찰에 적합한 세부항목을 골라 반영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ESG 우수 중소기업에 대한 입찰시 가점부여, 협상에 의한 계약에서의 기본 배점 확대 등 장려 방안도 검토, 시도하고 있다.

CSR 내지 ESG가 입찰참가, 낙찰자 선정 등의 조달절차에서 과연 어떠한 형식과 내용으로 확대될 것인지는 향후 다양한 논의를 거친 기준의 개정 과정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미 조달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반영하고 있는 해외 공공조달 선례 등이 구축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와 같은 흐름은 단순한 권고 사항으로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노블리제 오블리주는 공공조달에 있어서도 현실의 문제가 되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