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적 약자를 위한 징벌적 손해배상

김앤장 법률사무소 공공계약팀 변호사 김태완



금의야행

미국 캘리포니아의 소도시 힝클리에 사는 에린 브로코비치는 세 아이를 둔 이혼녀이다. 직장에서 해고당하고 파산선고까지 받은 그녀가 가진 은행 잔고는 16달러가 전부이다. 생계를 위한 일자리가 절실했지만 뚜렷한 자격증도 경력도 없는 그녀를 오라는 곳은 없다. 절망에 빠진 에린은 교통사고로 알게 된 변호사 에드를 무턱대고 찾아가 어떤 잡무라도 닥치는 대로 하겠다며 그대로 에드의 사무실에 눌러 앉는다. 착한 에드는 하는 수 없이 에린에게 장부정리 일을 시키지만 그녀의 당돌한 태도와 볼품없는 차림새로 동료 변호사들의 눈에 거슬리는 것을 부담스러워한다. 그러던 어느 날 에린은 수북이 쌓여있는 서류 속에서 이상한 기록들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인구 650여 명의 소도시 힝클리에서 전력사업을 하는 대기업의 공장이 치명적 발암물질인 ‘크롬’ 오염물질을 대량 방출하여 힝클리 마을 사람들이 병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에린은 주민들을 설득하고 에드의 도움을 받아 거대 기업을 상대로 하는 힘겨운 법정 싸움을 시작한다. 4년 뒤 법원은 당시 미국 역사상 최고의 징벌적 손해배상액인 3억 달러를 힝클리 주민들에게 지불하고 모든 공장에서의 ‘크롬’ 사용을 금지하는 판결을 내리게 된다.

2001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배우 줄리아 로버츠에게 여우주연상의 영예를 안겨 주었던 ‘에린 브로코비치’는 실화를 배경으로 한 영화이다. 평범한 여성이 부도덕한 대기업과 법정 소송을 벌이는 정의와 감동을 그린다는 의미 외에도 징벌적 손해배상이라는 우리에겐 다소 생소한 법률 제도를 실감 나게 보여 주고 있다.

‘징벌적 손해배상’이란 가해자의 악의적, 비도덕적인 불법행위를 응징하기 위해 실제 손해의 배상 외에도 징벌적 성격의 엄청난 손해배상액을 추가로 물리는 것을 말한다. 즉 손해에 상응하는 배상만으로는 예방적 효과가 충분하지 않기에 가해기업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배상을 치르게 함으로써 장래에 똑같은 불법행위를 반복하지 못하도록 막는 데에 주된 목적이 있다. 역사적으로는 B.C. 1750년의 함무라비 법전과 B.C. 1400년의 히타이트 법전에서 피해자가 실질적으로 입은 손해의 몇 배를 배상하게 하는 배수적 손해배상 규정을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의 효시로 알고 있다. 근대에 이르러 징벌적 손해배상은 영국의 보통법(common law)에 의해 발전되었고 1275년 “수도자의 권리를 불법적으로 침해한 자는 2배의 손해배상금을 지급하여야 한다”고 규정한 최초의 법률이 제정되었다. 현재 징벌적 손해배상은 영국, 미국과 캐나다 등 영미법을 근간으로 하는 국가에서 주로 행해지고 있다.

미국의 ‘맥도날드 사건’은 징벌적 손해배상이 기업과 사회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1992년 맥도날드 매장에서 커피를 구매한 스텔라 할머니는 설탕과 크림을 넣으려다 커피를 엎질러 다리에 3도의 화상을 입게 된다. 스텔라는 치료를 위해 맥도날드 측에 2만 달러의 합의금을 요구했지만 맥도날드는 800달러의 보상금을 제시하는데 그친다. 결국 손해배상금에 대한 소송이 진행되었고 배심원들은 맥도날드의 책임을 80%로 인정하는 동시에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를 적용하여 스텔라에게 무려 286만 달러의 피해 보상금을 지급하라고 결정한다. 재판부가 배심원들의 피해 배상액을 감액하여 64만 달러를 지급하도록 최종 판결을 내리면서 소송은 종결되었지만, 이 사건은 많은 기업들에게 소비자와 사회 안전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오게 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징벌적 손해배상은 우리와는 거리가 먼 제도였다. 처음 징벌적 손해배상제도의 도입을 추진할 때에도 ‘이중 처벌’이라는 경제계의 지적이 잇따르자 기업에 과중한 부담을 주는 것은 아닌지 검토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도입 논의가 철회되기도 하였다. 징벌적 손해배상이 우리 법체계와 맞는 않는다는 법원의 판결도 있었다. 불법행위의 가해자가 대한민국 국민이고 피해자가 미국인이었던 사건에서 미국 법원의 징벌적 손해배상 판결이 확정되고 이 확정판결에 기해 대한민국 국민인 가해자의 국내 재산에 대한 강제집행이 신청되자 법원은 “징벌적 배상 제도는 실제 피해에 상응하는 손해만을 인정하는 우리 민사법체계에서 인정되지 아니하는 형벌적 성격을 갖는 배상이므로 우리나라 공서양속에 반할 수 있다”고 판결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무수한 논란 속에서 2011년 최초로 ‘하도급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에 대기업이 하청업체의 기술 자료를 요구하거나 기술 자료를 유용해 손해를 입혔을 경우 실제 손해액의 3배의 범위 내에서 배상 책임을 지도록 하는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가 도입되게 된다. 당시 영미법계 국가에서 시행되는 제도를 도입할 경우 대륙법계인 우리 법체계와 충돌이 있을 것이고 다른 행정적인 제재수단으로도 기업의 불공정행위를 충분히 예방할 수 있다는 반대론도 많았지만, 현행 과징금 수준만으로는 대기업이 불법행위를 통해 벌어들인 수익보다 적어 예방효과가 미미하고 결국 경제적 강자에 의한 구조적이고 반복적인 불법행위를 효과적으로 억제하기 위해서는 징벌적 손해배상의 도입이 필요하다는 정책적 판단을 우선한 것이다.

이처럼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는 이미 우리 법에 편입이 되었고 이제는 그 적용의 범위와 강도를 정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시점에 와 있다. 처음 하도급 업체의 기술 자료를 탈취하고 유용하는 행위에 대해서만 적용되던 징벌적 손해배상은 부당한 하도급 대금 결정과 감액 행위, 부당한 발주 취소와 반품 행위로 확대되었고, 점차 적용 분야를 넓혀 가맹사업, 개인정보보호, 제조물책임, 중대재해처벌 등 다양한 분야의 개별 법률에 반영되고 있다. 이제는 상행위 전반에 징벌적 손해배상을 일반화하자는 법안까지 발의되면서 고도의 비난 가능성이 인정되는 위법행위에 대해서만 인정하자는 신중론도 드물지 않다.

징벌적 손해배상은 원조 격인 미국에서조차 순기능과 부작용에 대한 상반된 논란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기업의 부당행위를 효과적으로 차단하고 사회의 경제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필요와 더불어 우리 사회의 경제 실정을 감안하고 경제주체에 대한 과도한 규제가 아닌 올바른 정화작용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운용되어야 할 필요 역시 크다. 어찌 되었건 징벌적 손해배상이 우리 법 제도에 이미 편입되어 경제적 약자의 구제수단으로 자리 잡아가는 이상 상대 기업은 하도급 등 관련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