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격의 불일치와 조달

김앤장 법률사무소 공공계약팀 변호사 김태완



‘태양의 눈물’을 훔치다

 국 역사상 최고의 명의로 잘 알려진 편작의 이야기다. 편작은 전국시대 채나라 사람으로 의술을 익힌 후 전국을 주유하며 만인의 질병을 돌보았다. 한 번은 편작이 어떤 나라를 유랑하던 중 사람이 죽어 있는데, 시신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왠지 살아 있는 듯한 안색을 지니고 있었다. 편작은 죽기 전의 증상을 물어보고는 죽은 시신에게 침을 놓은 다음 약을 썼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던 사람이 살아나게 되었다. 이 소식은 아주 빠르게 전역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사람들은 편작이 신의(神醫)로서 죽인 사람도 살린다고 믿었다.

 채나라 환공은 이처럼 뛰어난 편작이 자기 나라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편작을 보고 싶은 나머지 포고문을 내어 채나라로 불러들였다. 서둘러 귀국한 편작은 궁에 들어가서 환공을 보자마자 그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을 하였다. “폐하는 병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병이 피부에 있을 뿐이어서 치료를 하시면 나아질 것입니다.” 그러나 환공은 이 말을 듣고 몹시 불쾌해했다. “의사란 작자들은 다 그렇다. 아무 병이 없음에도 병이 있다고 하여 사람을 현혹케 하고 의술이 높다는 소문을 내려고 한다.” 고 냉소적으로 말하였다. 10여 일 후 편작은 약을 들고 환공을 찾아갔다. 환공이 정원에 있을 때 편작은 환공의 안색을 보고 아주 근심스럽게 말하였다. “폐하의 병이 이미 근육 안으로 퍼졌습니다. 바로 치료하지 못하면 병증은 더욱 강해질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환공은 화를 냈으며 바로 얼굴을 돌려 버리고 편작을 응대하려 하지 않았다. 편작은 탄식하면서 궁을 떠나야만 했다. 다시 10여 일 후 걱정이 된 편작은 환공을 찾아간다. 그러나 환공을 본 편작은 곧 몸을 돌려 그 자리를 급히 떠난다. 환공을 이를 이상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편작을 불러들이고는 그 원인을 물어보았다. 이에 편작은 “병이 피부에 있을 때는 따뜻한 물로도 치료할 수 있습니다. 병이 근육에 이르면 침구로 바로 다스릴 수 있으며, 만약에 장과 위로 옮겨 가면 탕약을 복용하여 진정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병이 골수에 박히면 고칠 수가 없습니다. 현재 폐하의 병은 이미 골수 깊이 들어가서 치료하고 싶어도 이제는 방법이 없습니다.” 물론 자신의 건강을 과신한 환공은 편작의 말을 믿지 않았다. 5일이 지난 다음 거짓말처럼 환공은 온몸에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으며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제서야 편작을 찾아 나섰지만 편작은 사태를 예측하고 행장을 꾸려 이미 채나라를 떠난 뒤였다.

 사람의 일이건 행정이건 누구에게나 결점이 있다. 그러나 타인에 의해서 건 혹은 본인의 성찰로 알게 된 것이든 결점을 인정하고 스스로 고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중국의 고사 ‘휘질기의(諱疾忌醫 : 자신의 병을 덮고 고치려 하지 않다)’는 자신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알게 되었을 때 그것을 인정하고 스스로 개선해 나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필요한 것인가를 역설하고 있다.

 정부 계약은 국가계약법 등 각종 법령을 통해 계약상대자가 정당한 이유 없이 계약을 이행하지 않을 경우, 계약해제, 계약보증금 국고귀속, 부정당업자 제재 등 민간의 거래보다 강하고 다양한 제재수단을 부과하고 있다. 예를 들어 발주기관이 입찰 당시 규격서 내지 사양서를 제시하며 그 충족을 요구하였을 때, 기본적으로 입찰에 참여하는 자는 규격대로의 이행 가능성을 사전에 확인해야 하는 의무가 있으며 요구 성능을 충족하지 못하였을 경우 그 불이행의 책임은 계약을 체결한 자에게 있다.

 그런데 만약 발주기관이 제시한 규격 자체에 결함이 있어 규격서 그대로 제품을 만든다 하더라도 애당초 요구 성능을 충족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 경우에도 불이행에 관한 모든 책임을 계약업체가 부담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 것인가. 이는 입찰에 참여하는 자가 규격대로 계약을 이행할 수 있는지 여부를 사전에 확인해야 한다는 발주기관의 입장과 충돌되는 측면이기도 하다.

 발주기관이 제공하는 규격 내지 규격이 요구하는 성능이 어떠한 의미를 갖는 것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개발용역은 기존에 없는 신규 물품의 개발과 기성 물품의 성능개량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정부가 제공하는 규격 내지 기술 자료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발주자인 정부가 요구 성능을 제시하면 개발에 참여하는 업체가 요구 성능 충족에 관한 책임을 전적으로 부담하는 조달방식이다. 즉, 연구개발은 정부가 제안요청서에 명시한 요구 성능에 대하여 업체 스스로 요구 성능을 충족하는 개발계획을 제안하고 이를 토대로 낙찰자를 선정하고 계약을 체결한다는 점에서 요구 성능 미충족으로 인한 책임을 종국적으로 업체가 부담해야 한다는 논리적, 법리적 귀결이 가능할 수 있다.

 요구 조건을 충족하는 국내 생산품이 없는 경우에 추진하는 해외 구매도 같은 성격으로 볼 수 있다. 차기전투기 구매와 같은 해외 무기의 구매는 기술 및 공급 독점의 성격이 강하고 일반 조달물품의 구매와 달리 장비 정보의 획득이 어려워, 우선 정부가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주요 작전운용성능, 요구 성능을 제시하면 이를 구현할 수 있는 기성품을 생산, 보유하고 있는 해외 업체가 제안서를 제출하는 형식으로 진행한다. 정부가 제안한 요구 성능에 대해 해외 업체가 이를 구현할 수 있는 기성품의 공급을 제안한다는 점에서 요구 성능을 충족하지 못하는 계약목적물의 공급은 업체의 책임으로 귀결된다.

 그러나, 일반 조달물품의 제조 구매는 조금은 다른 각도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보편적으로 정부가 규격을 제시하는 동시에, 이를 구현할 수 있는 기술 자료를 제공하고 계약업체로 하여금 이를 충족하는 물품을 생산, 공급하도록 한다. 이 경우, 정부는 입찰 공고 시 계약목적물에 대한 규격, 형상 등 정확한 사양을 확보하여 입찰 참여업체에게 제공해야 한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정부가 제공한 기술 자료에 따라 계약목적물을 제조하면 성능 구현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전제로 발주를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국내 제조구매계약의 경우 결함이 없는 규격의 제공은 발주자인 정부의 선행 의무인 셈이다.

 한 사례를 예로 들어 보자. 발주기관 A는 규격서와 견본을 제공하면서 특정한 물품을 만들도록 하였고 해당 규격에는 물품이 특정 성능을 충족해야 한다는 조건을 요구하고 있었다. 계약업체 B는 A가 제공한 규격서와 견본이 제시하는 형상, 구조와 동일하게 물품을 제조하였지만 규격서에서 요구하는 성능은 도저히 충족할 수 없었다. 그 과정에서 B는 계약 금액에 상당하는 금액을 자비로 지출하며 성능을 만족시키기 위한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더불어 규격과 성능이 불일치한다는 문제를 수차례 제기하고 규격의 완화, 수정을 요구하였지만 발주기관은 규격의 하자를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발주기관은 업체의 책임에 의한 계약불이행이라고 단정하고 계약을 해제함은 물론 계약보증금 국고 귀속, 부정당업자 제재의 절차를 밟아 나갔다.

 그러나 법원은 B가 제기한 부정당업자 제재처분 취소 청구에 대해 “입찰에 참여하는 자가 규격의 이행 가능성을 사전에 확인해야 하는 기본적인 의무가 있다고 하더라도 만약 그 계약불이행이 피고가 제공한 규격서의 하자에 따른 결과로 판단된다면 이는 피고의 책임 영역에 있다”고 하여 B의 손을 들어 주었다.

 규격의 미충족이 업체의 기술력 부족 때문인지 아니면 규격 자체의 문제인지를 명확히 입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규격의 문제가 불성실한 업체의 책임 회피를 위한 유력한 수단이 되는 것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기술적으로 놓칠 수 있는 규격의 하자는 충분히 존재할 수 있으며 그러한 경우에도 계약불이행의 책임을 막연히 업체에게 지우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채나라 환공이 병증을 인정하고 이를 치료하기 위해 노력했다면 편작이 덧없이 진나라로 떠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