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조달에서의 피스 메이커(Peace maker)

김앤장 법률사무소 공공계약팀 변호사 김태완



‘태양의 눈물’을 훔치다

 시아의 외진 탄광촌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폭발이 대지를 흔들어 놓는다. 기차로 운반하던 핵무기가 반대편에서 달려오던 기차와 정면충돌하여 폭발한 것이다. 사건은 전 세계를 긴장하게 만들고 문제의 기차를 둘러싼 조사는 어느 조직의 핵무기 탈취 사건과 연루된 것으로 밝혀진다.

 백악관의 핵물리학 자문 위원이 사건 대응 총책임자로 선임되고, 이를 돕기 위해 육군 특수정보국 소속 요원들이 파견된다. 핵무기를 탈취한 테러 조직은 미국 뉴욕을 파괴시킬 목적으로 핵폭탄을 배낭에 짊어진 채 유엔본부를 향해 달리고 이를 막아야만 하는 요원들은 뉴욕을 누비며 긴박한 추격전을 펼친다.

 배우 조지 클루니와 니콜 키드먼이 주연을 맡은 이 영화의 제목은 「피스 메이커」이다. 옛 영화를 끌어온 이유는 피스 메이커라는 이름이 가지는 조금은 생소한 의미 때문이다. 피스메이커는 보통 ‘평화주의자’ 내지 ‘분쟁을 종식시키려 애쓰는 중재자’를 의미하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 ‘예방법학’이라는 법률 분야의 애칭이기도 하다.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지도 않았는데 집 주인의 말을 믿고 이사를 가버리거나 영수증도 받지 않고 돈을 빌려준다. 뜻하지 않게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은 생각하지 못한 채 증빙을 남기지 않고 중요한 법률행위를 한다. 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법원의 문을 두드리고 법률가를 찾는다. 그러나 근거가 없는 호소에 도움을 주거나 손을 들어 줄 수 없다.

 한국은 경제규모가 더 큰 나라들과 비교해 소송 건수가 많다고 한다. 법보다는 인정에 의존하는 우리 삶의 방식에도 일부 연유한다. 사람과 사람의 정과 신뢰에 의지하는 고유의 정서가 실상은 ‘거래의 상식’에 반하는 것이다. 객관적인 증빙과 보호 장치를 남겨두지 않은 상황에서 진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사자의 어느 한쪽이 사실을 왜곡하여 주장하면 방법이 없다. 사실은 하나인데 주장이 상반되고 억울한 쪽도 거짓말을 하는 쪽도 소송을 제기한다.

 이 때문에 피스메이커라는 애칭으로 예방법학이 발전해 오고 있다. 이는 거창한 것이 아니라 영수증 작성하기, 계약서 검토하기, 법률에 맞는 유언장 쓰기 등 간단한 수칙의 실천과 더불어 사전에 분쟁을 막고 관계를 지키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이다. 경제규모가 큰 일부 선진국이 우리보다 소송 건수가 적은 것은 단순한 실천에 있다. 친구나 이웃에게 믿음만으로 수천만 원의 돈을 빌려주거나 보증을 서 주지 않으며, 부동산을 매입할 때도 법률가의 도움을 받아 계약서를 점검한다. 주요 거래는 보험을 통해 위험을 분산하여 불필요한 분쟁을 줄인다. 예방법학은 개인의 분쟁 수요를 막아주는 동시에 사회비용과 국가경쟁력에도 영향을 미친다.

 공공조달은 계약의 일방 당사자가 정부 기타의 공공 주체이고 규정에 따른 절차와 문서에 의한 진행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민간의 거래보다는 신뢰성이 높다고 볼 수 있지만, 조달 관련 소송을 담당하는 정부 부처의 업무량이 최근 수 년 사이에 현저히 늘어나고 있다는 점은 공공조달이라고 하여 달리 취급할 이유가 없음을 의미한다. 여전히 많은 조달 주체들은 계약조건에 기재된 사항이 문제 발생 시 어떠한 불이익을 발생시키는지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채 그대로 받아들이고 현장에서 요구하는 규격의 변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한 상태에서 선의의 이행을 한다.

 업체 A는 계약 규격이 요구하는 물품을 제조하고 설치할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행 과정에서 수요기관이 현장여건에 맞도록 제품의 형상 일부를 변경해 달라고 요청하였고 A는 비용 추가를 감수하면서 수요기관이 요청한 제품을 성실하게 만들어 납품하였다. A에 뒤늦게 돌아온 것은 칭찬과 격려가 아니라 계약 당사자인 조달청의 승인이나 정식 변경 절차 없이 계약 규격과 다른 제품을 납품하였다는 것을 사유로 하는 6개월의 부정당업자 제재였다. A가 변경된 제품을 납품해도 문제가 없을지 단 한 번이라도 조달청에 문의하였다면, 계약조건을 다시 살펴보거나 법률전문가에게 문의하였다면 피할 수 있는 일이었다. 직접생산 여부를 점검하러 온 관계자가 제시한 문서나 가격검증결과에 대해 그 의미를 확인하지 않고 서명한 것이 부당이득의 기준이 되고 제재의 근거가 되는 일이 적지 않다. 계약서, 계약조건 그 밖의 권리 의무와 관련되는 문서는 수차례 읽어보고 그 의미를 파악하려 노력해도 부족함이 없다.

 건강과 관련해서는 폐결핵이 생겨야만 의사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감기에 걸려도 의사를 찾아 간다. 조달 계약에 대한 관심도 이와 같아야 한다.